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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집’에 부치는 시—건축가 김중업에 대하여

꿈과 건축

아이들은 조형을 유희하고 건축을 유희한다. 그것은 아이들의 유희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한다. 흙집을 지을 때, 모래성을 쌓을 때, 아이들은 저들의 환상의 모양을 짓는다. 나무토막을 엮어 올리면서도 그들은 꿈을 투사한다. 넓으나넓은 세계에서, 그들만의 공간에서, 그들만의 생각과 사상을 아이들은 향유한다. 그럴 때 한 아이는 비로소 저마다의 세계 속에서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싹을 가꾸는 것이다. 그렇게 한 아이는 자신을 ‘나’라고 이름지을 수 있는 기틀을 잡는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건축 유희를 곧 자기 구축의 유희로 탈바꿈한다. 세계에서 나를 가늠하는 공간을 스스로 지어내는 일, 그것이 아이들의 유희하는 조형과 삶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은연중 그 공간에 보호가 깃들고 안식이 스며감을 느낀다. 그 다소곳함, 평안함, 그리고 감싸인 포근함을 느끼며 아이들은 신이나 세계와 같은 것을 흡족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가장 웅숭깊은 꿈 속에서, 내일이란 으뜸에서 부푼 꿈을 꿀 것이다. 그것이 꼭 자신 곁에 있는 인형이기나 하듯이.

따라서 어른이 되어 건축가가 되지 못한 사람은 영원히 덜 자란 어린이로 머물게 되리라. 또는 건축의 유희를 중단함으로써 어렸던 시절을 어른의 시절에 이어붙이지 못한 채 영영 동심을 등지게 되리라.

이러한 이유에서 건축가는 축복받은 어른인 것이다. 건축가는 동심에 순조롭게 접목된 어른의 시간을 누린다. 그들은 여전히 흙집을 짓던 어린이, 모래성을 쌓던 어린이, 그리고 나무토막을 엮어 형태를 만들던 어린이를 자신들의 감상으로 삼을 수 있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예술가로서 풍요롭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풍요로운 것이다. 사실 저 엄청난 높이의 마천루는 결국 구름을 걷는 사다리가 아니던가. 휘어지며 도는 회랑을 지닌 집은 굼뜨게 발을 옮기는 공룡이 아니던가. 벽이 불거져 나오고 처마가 차양처럼 둘린 건물은 투구를 쓴 기사의 얼굴이 아니던가. 몇 개의 아치를 알맞게 구성하고 그것을 가는 기둥으로 받칠 때, 그곳은 숨바꼭질을 하는 놀이터가 아니던가.

공학이 있고, 계산과 측량이 있고, 어마어마한 수놀음, 바르거나 모나고 휘어진 무수한 자들과 연장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문명의 물증들만큼이나 어른들의 건축은 아이들의 흙집과 모래성과는 달라져 있을까.

적병을 수없이 물리친 성곽도 아이들이 하루 걸려 만든 모래성에 비하면 얼마나 초라하고 단조로울까. 쾰른의 돔이라 하더라도 아이들의 고깔모자에 비하면 얼마나 뻣뻣하고 굳어있을까. 그 대량의 기계도, 정교한 기구도, 바른 설계도도 흙집을 만든 아이의 꿈에 한없이 다가가기 위한 어른들의 몸부림일 뿐, 결국 꿈은 늘 저만큼 떨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래성을 만드는 건축가들의 꿈이 건네는 초대를 받은, 그리고 그 초대에 응한 행복한 사람들이다. 꿈을 향해 끝없이 달리는 사람을 어찌 꿈을 내던진 사람과 비교하겠는가.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은 조형을 유희하던 모든 어린이들의 못다한 꿈이 어우러지는 커다란 꿈, 총체적인 꿈으로써 우리 앞에 있다. 그 꿈들은 건축가 김중업의 건축 공간에서 여러가지 뜻으로 형상화된다.

그가 칸을 자를 때, 공간을 구획할 때, 이미 무엇인가 결정되고 그것은 곧 굳건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확정한 굳건함은 곧 새로이 시작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환기‘의 시작이다. 그의 원, 그의 선, 그의 형체가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꿈, 우리들의 상상력,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들의 무의식을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우리들을 집에 들어와 살라고 초대하면서도 더욱 깊은 차원으로 우리들을 초대한다. 더불어 꿈꾸고, 더불어 새로운 형태를, 선을, 원을 창조하기를 소망하며.

우리들은 그의 건축 속에서 단순히 방문하는 사람으로 머물지 않고, 건축의 참여자로 건축 속에 머문다. 그의 공간에서 그의 상상과 꿈을 더불어 꾸며 우리들 꿈의 집으로 각인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김중업의 작품이 우리들의 상념이며 생각의 꽃이며 형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곧 각자의 ‘존재의 집’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들 세기의 기념비

환상은 번번이 기화하고 상념은 안개로 떠다니려 한다. 꿈은 늘 구름과 어울려 바람을 희롱하기를 즐긴다. 이 떠다니는 것들, 너울대며 사라지고자 하는 것들을 담아내는 일, 그것을 위해 덫을 놓는 일에 김중업은 전념한다. 그래서 그의 작품 앞에 서 있으면, 풀밭을 건너온 바람이 불어오고, 물살을 스쳐온 안개가 내려앉는다. 그리고는 이리 모을 수 없고, 차마 볼 수 없는 것들이 어렴풋이 모양을 만드는 모습이 보인다. 가장 가벼운 것들이 부담없는 무게를 지니고, 가장 흩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들이 나무의 나이테이듯 선연한 자국으로 들어박히고도 사뭇 편안하게 남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유가 뜻대로 유희하되 애초부터 가지런한 경지였다. 이 희한한 경지에서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은 기념비인 것이다.

자유의 넋, 자유로운 영혼이 나래를 퍼덕이되, 그 날갯짓이 이룩하는 선과 조형이라는 이유에서 그의 작품은 세기의 기념비로 우리 곁에 있다. 그의 건축은 허리를 굳힌다. 하지만 그 굳힘은 풀기 위해 존립한다. 열어젖히고 안아들이기 위해 그의 공간은 거상의 다리이듯 지각을 밟는다. 그의 작품에서 지각 위의 또 하나의 지각으로써 우뚝 서있는 지붕은 하늘의 넓이를 가늠하고 가벼운 부피를 겨냥한다. 그 막중한 중력과 중압이 땅에 닿더라도 그것은 결코 구속하는 힘이 아니다. 일랑이는 공기의 설렘을 떠받드는 힘일 뿐이다. 그의 건축이 기념비인 것은, 단지 땅으로 어우러지는 화음의 미학 속에서 그의 작품은 서있기 때문이다.